이색적이고 강렬한 공포 게임, 캐리언 Carr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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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적이고 강렬한 공포 게임, 캐리언 Carrion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공포를 소재로 한 대부분의 작품들은 직접 위기 상황에 처해 공포로부터 도망치거나 저항하는 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던 것 같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 공포에 처하는 입장을 묘사하는 것이 감정을 이입하는 데 있어서나 작품에 몰입하는 데 있어서나 훨씬 유리한 방향일테니 말이다. 그래도 어쩌면 한결같이 흉측한 생김새, 강한 완력, 그리고 온갖 계교를 활용해 인간들을 괴롭히는 괴물들에게도 나름의 고충 정도는 있지 않을까.

올해 여름, 지구 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보다 가장 혐오스러운 생김새의 촉수 괴물을 직접 조종하는 게임 캐리언(Carrion)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게임을 통해서라면 괴물이 인간들을 습격했을 때 느끼는 쾌감과 강한 저항을 받아 뜻대로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은 못하는 고충에 대해 조금이나마 공감하게 될지도 모른다.

Carrion 이제 우리가 직접 괴물이 되어보는 건 어떨까. [암네시아 : 다크 디센트(Amnesia : The Dark Descent)]
Carrion 흉측한 촉수 덩어리 괴물의 말 못할 사정. 캐리언(Carrion)

캐리언은 붉은 촉수 덩어리를 조종해 지하 연구소 안의 인간들을 모조리 도륙내고 연구소를 탈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플랫포머 계열의 게임으로, 공포에 질리는 입장이 아니라 직접 공포를 선사하는 입장이 되어보는 '역공포'라는 개념을 전면에 내세운 독특한 게임이다. 붉은 촉수 덩어리의 기괴하고도 흉측한 생김새와 끔찍한 공포를 마주한 인간들의 반응, 그리고 지하 연구소의 풍경을 세밀하게 담아낸 고퀄리티의 픽셀 그래픽이 인상적이며, 붉은 촉수 덩어리의 움직임에 따른 지형의 변화 또한 정교하게 구현돼 있다. 또한 대다수의 공포 게임과는 다르게 직접 소름끼치는 괴물을 조종해 인간들을 습격하는, 다시말해 인간들에게 공포를 직접 선사하는 입장에서 게임을 진행한다는 점이 꽤나 신선하게 다가온다.

Carrion 음식은 꼭꼭 씹어먹으렴. 급하게 먹다 체하지 말고,
Carrion 겉보기와는 다르게 액션보단 퍼즐의 비중이 더 큰 게임이다.

넓은 지하 연구소를 돌아다니며 인간들을 습격해 잡아먹고, 곳곳에 놓여있는 DNA 조각을 흡수해 더욱 거대하고 강력한 형태로 진화해나간다. 꾸물거리는 붉은 촉수 덩어리의 꾸물거리는 움직임과 촉수를 휘둘러 인간들을 습격하는 광경의 임팩트가 상당하긴 하지만, 막상 인간을 습격하는 부분의 비중이 생각보다 그다지 크지 않을 뿐더러 난이도 또한 크게 어렵지도 않다.

오히려 실제 게임플레이에 있어서는 인간들을 습격하는 것보다 지형의 구조를 파악해 나아갈 길을 찾고 붉은 촉수 덩어리의 형태 변화를 바탕으로 해결책을 찾는 것이 더 핵심이 된다. 즉 인간들에게 공포를 선사하고 그들을 붙잡아 처참하게 찢어발기는 것이 메인이 될 것만 같았던 첫인상과는 다르게 실제 게임은 액션보다는 퍼즐의 비중이 더 큰 것이다. 따라서 이 게임의 장르를 정의한다면 액션 플랫포머라기보단 퍼즐 플랫포머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Carrion 촉수 괴물이라고 뭐든지 잘하는 건 아니다. 이제는 괴물도 머리가 좋아야 하는 시대.
Carrion 제아무리 흉폭한 괴물도 불에는 별 도리가 없다.
Carrion 촉수 덩어리를 강하게 만들어주는 DNA 조각. 사실 게임 진행에 큰 도움은 안 되는 것 같지만,

액션 파트의 비중이 적다고는 해도 액션 파트가 플레이어에게 선사하는 임팩트만큼은 상당한 수준이다. 붉은 촉수 덩어리의 흐느적거리고 꾸물거리는 소름끼치는 움직임과 붉은 촉수 덩어리가 지나온 길이 시뻘겋게 물들어버리는 모습, 끔찍한 괴물을 본 인간들의 생동감 넘치는 반응, 그리고 괴물의 난동으로 인해 처참하게 파괴되는 연구소의 광경. 이 모든 것들이 고퀄리티의 픽셀 그래픽을 통해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다. 특유의 고어 연출만으로도 능히 플레이어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한편 게임의 흐름은 한 눈 팔거나 결정적인 분기점 없이 오로지 단방향으로만 진행된다. 맵 기능이 갖춰져 있지 않지만 보기보다 스테이지의 구조가 단순해 위치를 헷갈릴 일은 거의 없다. 추가 DNA 조각이라는 수집거리가 존재하긴 하지만, 대개는 게임을 어느 정도 진행하고 붉은 촉수 덩어리의 진화가 충분히 이루어진 뒤 획득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 수집거리가 게임의 또 다른 분기가 된다거나 하는 식의 영향력을 끼치지는 못한다. 게임 상에 별다른 지시가 없지만, 레벨 디자인이 꽤나 정교하게 이루어져 있어 집중력을 잃지 않고 스테이지 곳곳을 꼼꼼히 살펴보면 크게 헤메거나 게임의 흐름이 끊길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한 번 지나왔던 곳을 다시 거쳐야 하는 구간이 종종 보이는 건 감점 요소라 할 만하다.

Carrion 아무리 생각해도 픽셀 그래픽과 고어한 분위기는 서로 궁합이 정말 잘 맞는 것 같다.
Carrion 미니맵도 없고 별다른 지시도 없지만 깔끔한 레벨 디자인 덕분에 크게 헤멜 일은 잘 없다.

반면 조작감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편이다. 워낙이 생김새부터 난잡하고 우악스러운 촉수 다발의 움직임을 단순한 조작으로 구현해내기가 쉬운 일만은 아니었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플레이어의 의도와는 다르게 움직일 때가 많아 자잘하게나마 거슬릴 때가 많다. 그나마 붉은 촉수 덩어리의 크기가 작을 땐 조작의 불편함이 크게 체감되진 않지만, 촉수 덩어리의 크기가 가장 큰 3단계 형태의 경우 장사진마냥 길게 늘어진 촉수 덩어리의 중심부를 파악하기가 어려워 제어하기가 굉장히 까다로워진다. 이는 패드로 플레이했을 때의 개인적인 체감이긴 하지만, 짐작컨대 키보드/마우스로 게임을 플레이했더라도 조작감에 있어서 유의미한 차이가 있을 것 같진 않다.

스토리의 비중이 크진 않고 그만큼 캐리언이라는 게임에 있어 스토리가 큰 역할을 수행해내지도 않는다. 별도의 대사나 나레이션 없이 그저 붉은 촉수 덩어리에 점차 잠식되어가는 연구소의 풍경을 정직하게 묘사해낼 뿐이다. 그래도 이야기의 앞뒤 맥락은 비교적 자연스럽게 이어지기도 하고 결말부에서 꽤나 충격적인 반전을 보여주며 게임을 마무리짓기도 하는 등, 스토리가 게임을 진행하는 데 있어 동기부여 정도의 역할은 충분히 수행해내고 있는 모습이다.

Carrion 덩치가 커지는 만큼 통제도 어려운 괴물. 살짝 거슬리긴 해도 나름 고증을 잘 지켰다고 볼 수 있을지도,
Carrion 결말이 은근히 충격적이다. 한동안은 주변 사람들을 잘 경계해야 할 것 같다.

기괴하고 끔찍한 생김새의 붉은 촉수 덩어리와 당장에라도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지하 연구소는 비주얼만으로도 상당한 공포를 발산하고 있다. 또한 강력한 존재로부터 도망다니거나 저항하는 입장이 아닌 직접 강력한 존재가 되어 인간들에게 공폴를 선사하는 '역공포'라는 컨셉은 독특하고도 신선하며, 압도적인 고어 연출과 적절한 레벨 디자인이 어우러져 역공포라는 컨셉을 게임플레이를 통해 적절히 녹여낸 모습이다. 플레이타임은 4시간 남짓으로 가격에 비해 길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만큼 짧으면서도 굵고 강렬한 충격을 선사하는 게임이라 할 수 있겠다. 강렬한 개성만큼 결함도 적지 않긴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공포라는 재료를 적절히 활용해 퍼즐과 액션을 적절히 배분한 좋은 게임이라 평가할 수 있다. 이색적이면서도 강렬한 공포 게임을 플레이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자신있게 추천할 수 있을 게임이다.

Carrion
Kutar'k 필자: Kutar'k
Steam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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