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트로 호러 어드벤처: 시그날리스(Signal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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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로 호러 어드벤처: 시그날리스(Signalis)

■ 레트로 게임이라고 하면?

보통 레트로 게임이라고 하면 2D 픽셀 그래픽의 탑뷰 혹은 사이드뷰 시점을 탑재한 게임을 떠올리는 이들이 꽤 많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게임이라는 매체에도 역사가 쌓이고 쌓이면서 레트로는 점차 많은 영역을 아우르게 된다. 당장 게임계에 3D 그래픽이 처음으로 대두되던 시기를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로 놓곤 하는데, 이를 지금 시점에서 보면 무려 20년도 더 된 과거의 일이니 말이다. 따라서 현 시점을 기준으로 놓고 보자면 저 당시 낮은 질감의 투박한 그래픽과 이제 막 3D를 맞이하느라 미처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이질적인 조작감 역시 레트로의 영역으로 놓고 봐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대개 레트로를 지향하거나 게임들을 잘 살펴보면 단순히 비주얼적인 측면만 그 시절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게임의 장르나 컨셉, 분위기까지도 그 시절의 영향을 다분히 받은 경우가 상당히 많다. 이를테면 1990년대 닌텐도의 전성기를 그리워하는 레트로 게임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슈퍼 마리오(Super Mario) 시리즈 느낌의 플랫포머 게임이거나 젤다의 전설(The Legend of Zelda) 시리즈 같은 액션 어드벤처 게임인 것이 좋은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낮은 질감의 투박한 폴리곤 또한 좋은 레트로의 표본이라고 언급했던 것처럼, 저 당시의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바이오하자드(Biohazard) 시리즈나 사일런트 힐(Silent Hill) 시리즈에 영감을 받은 레트로 게임들이 속속들이 등장하고 있다. 어쩌면 오늘 소개할 게임인 시그날리스(Signalis) 또한 여기에 포함되는 게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SIGNALIS 낮은 질감의 폴리곤 그래픽과 이질적인 조작감도 이제는 레트로 취급이다.[바이오하자드 2(Biohazard 2)]
SIGNALIS 붉은 안개가 내리깔린 연옥에 못다 핀 꽃 한 떨기. 시그날리스(Signalis)
■ 호러풍 액션 어드벤처+레트로 감성

시그날리스는 멸망을 맞이한 디스토피아 세상 속에서 흉측한 괴물들의 습격을 피해 다니며 정부 시설을 수색하고 누군가를 찾고자 하는 임무를 수행해나가야 하는 레플리카 엘스터의 이야기를 담은 호러풍 액션 어드벤처 게임이다. 낮은 질감의 3D 폴리곤 그래픽과 더불어 특유의 조작감과 인터페이스, 그리고 호러를 표방하는 어두운 분위기는 90년대 말의 레트로 감성을 지향하고 있다. 여기에 강압적인 공산주의가 만연한 황량한 세계관 안에서 인간 대신 레플레카라 불리는 기계 인간들이 주로 등장하는 스토리는 니어 오토마타(Nier Automata)와도 유사한 면이 있다. 특히 상당히 자주 보이는 독일어와 더불어 레플리카들의 제복 디자인을 보건대 20세기 초 독일민주공화국, 즉 동독의 사회상에서 모티브를 채용한 것으로 보인다. (굳이 한 가지 더 첨언하자면, 멕시코 출신의 유명 영화감독인 기예르모 델 토로가 극찬을 아끼지 않으며 직접 홍보에 나선 게임이기도 하다.)

소재의 방향성은 아주 뚜렷하다.
SIGNALIS 바이오하자드나 사일런트 힐에 니어 시리즈를 끼얹은?
SIGNALIS 독일어를 알았더라면 또 다른 관점에서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었을 지도,
■ 나름의 디자인과 완급 조절

전반적인 게임 플레이는 확실히 플레이스테이션 시기에 주류를 이루었던 호러 게임에서 영감을 얻은 듯한 부분이 보이면서도 (심지어 네 방향 키 중 위/아래가 전진/후퇴고 좌/우가 좌회전/우회전인 그 시절의 조작 방식을 따로 지원한다!) 꽤나 흥미롭게 다가온다. 걷기와 뛰기를 통해 이동 속도를 조절하고 해당 구역의 여러 방을 돌아다니며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단서와 아이템을 찾는 과정은 플레이어의 흥미를 유발하는 것과 동시에 몰입을 깨뜨리지 않는다. 대체로 각 구역의 구조가 조금 복잡하긴 하지만, 한 번 지나간 곳은 지도를 통해 전체 구역의 구조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어 쾌적하게 게임을 진행할 수 있다.

확보한 총과 탄환을 활용해 적을 쓰러뜨리는 전투의 경우, 적들이 주인공 캐릭터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하고 획득하게 되는 탄환이 넉넉치 못해 신중한 전투가 요구된다. 여기에 확실한 수단을 활용해 제압하지 않으면 한 번 쓰러뜨린 적이 종종 다시 일어날 때가 있어 어느 정도는 전략적으로 행동할 필요도 있다. 이로 인해 전투가 은근 까다롭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만큼 호러 게임 특유의 공포와 긴장감을 한층 끌어올리는 효과를 유도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적들의 생김새가 생각보다 조금 심심한 감이 있기도 하고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플레이어를 놀래키는 점프스케어 구간이랄 것도 딱히 없어서 정작 호러의 느낌이 조금 떨어질 순 있다.

그 밖에 주파수를 조절하는 무전기의 활용과 일부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미니 게임, 그리고 게임의 진행에 따라 1인칭으로 시점이 바뀌는 구간이 게임의 흐름을 잘 환기시켜준다. 특히 무전기 주파수는 은근히 여기저기 활용할 곳이 많아 항상 의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미니 게임은 난이도가 조금 있는 편이라 머리를 잘 써야 한다. 전반적으로 1990년대 말 호러 게임의 규격을 그대로 따라가는 듯 하면서도 나름의 디자인과 완급 조절은 제법 심혈을 기울인 모습이다.

마냥 안심할 수가 없다.
SIGNALIS 지도 하나는 정말 잘 갖춰놨다.
SIGNALIS 머리를 좀 써야 하는 미니 게임. 그래도 덕분에 게임의 환기는 잘 된다.
■ 단점 또한 레트로

다만 20년도 더 지난 고전 게임의 요소들을 그대로 가져오다시피한 게임이다보니 단점 또한 그 시절 게임의 그것을 그대로 따라간다. 가장 발목을 잡는 부분은 역시 가시성과 조작감이다. 전체적으로 색감이 어두워 오브젝트 사이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다보니 지형의 구조라던가 적과 아이템의 유무를 한 눈에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낮은 질감의 그래픽에 따른 주인공 캐릭터의 어색한 움직임이 반영된 듯한 조작감은 왠지 모르게 손에 잘 익지 않는다. 무기 활용도 쉽지 않은데, 모든 탄환을 소모한 무기는 일일히 재장전해줘야 하는 데다가 자동 에임이 잘 안 들을 때가 종종 있어 전투 시 조작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특히 에임의 경우 적이 여럿 있을 때 이따금씩 에임이 꼬여 플레이어를 난감하게 만들기도 한다.

무엇보다 불과 여섯칸 밖에 사용할 수 없는 인벤토리는 게임 내내 상당한 고통으로 다가온다. 가뜩이나 무기와 탄환, 보조장비, 회복 아이템이 전부 인벤토리를 한 칸 씩 차지하다보니 실질적으로 비워둘 수 있는 칸은 잘해봐야 두세칸 남짓으로 인벤토리 관리가 아주 까다롭다. 이로 인해 처음 구역을 탐험하는 과정에서 아이템을 획득하지 못하는 상황이 항상이라고 할 만큼 자주 발생하며, 모든 아이템을 획득하기 위해 창고가 있는 방까지 여러 번 움직여야 하니 동선 또한 심하게 꼬인다. 심지어 그 옛날의 바이오하자드 시리즈조차도 여덟 칸의 인벤토리가 제공됐는데, 레트로를 지향한 점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여섯 칸의 인벤토리 제한은 너무나도 가혹하게 다가온다.

인벤토리 여섯 칸 제한은 솔직히 너무했다
SIGNALIS 이런 게임에서까지 감나빗!을?
■ 시각적인 연출에 공을 들였다

한편 소중한 이를 찾고자 정부 시설을 수색하는 엘스터의 여정을 담은 스토리는 주요 상황 이후 드러나는 컷신과 여러 서류를 통해 은근한 방식으로 묘사된다. 게임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보게 되는 각종 선전물과 서류를 잘 살펴보면 게임의 배경 이야기가 세밀하게 담겨있어 스토리를 파악하는 데 나름 큰 도움이 된다. 여기에 엘스터를 포함한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는 컷신은 대사는 거의 없지만 붉은색의 비중이 매우 높은 색감과 더불어 의문의 한자와 독일어가 난무하는 강렬하고 화려한 연출로 플레이어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그 밖에 게임 중간중간 만나는 레플리카들은 극한의 상황 속에서 불안정한 심리를 여과 없이 드러내기도 하는데, 이것이 연구소를 점거한 괴물들의 정체와 대조를 이루면서 서사적인 측면에 있어 좋은 대비를 보여주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텍스트를 통한 구체적인 설명보다는 시각적인 연출에 좀 더 공을 들인 모습이다.

플레이어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강렬한 연출
SIGNALIS 기계인간인 레플리카에게도 감정이 있었음을 시사
■ 스토리의 집중력을 끌어올리는 데는 실패

이렇듯 강렬하고 화려한 연출과 더불어 서류를 통한 세밀한 설정 전달은 훌륭하지만, 정작 서사의 알맹이가 부실해 스토리의 전개와 결말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점이 치명적으로 다가온다. 대체로 이전 장면과 이후 장면이 서로 다른 상황을 보여주는데 장면과 장면 사이를 이어주는 연결 고리가 부실해 전체적인 스토리의 맥락이 뚝뚝 끊어진다. 여기에 중간중간 나타나는 컷신은 연출이 화려하긴 해도 그 의미를 파악하긴 어렵다. 그나마 공산주의와 레플리카, 그리고 동성애라는 키워드가 워낙 뚜렷하기도 하고 게임상에 등장 하는 여러 서류의 내용을 바탕으로 그 내막을 추론해볼 수 있긴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추론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특히 중반부에 나타나는 페이크성 엔딩은 선을 넘었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페이크 엔딩의 그 어디를 둘러보아도 이것이 페이크라는 암시가 전혀 없다시피한 데다가, 엔딩 이후 별다른 설명 없이 게임의 메인 화면으로 되돌아오다보니 어지간한 플레이어라면 이것이 페이크 엔딩임을 인지하기조차 어렵다. (하필이면 그 메인 화면에 페이크라는 미약한 암시가 있긴 하지만, 워낙 미약하다보니 알아차리기조차 쉽지 않다.) 그렇다고 페이크 엔딩 이후의 전개와 네 가지 멀티 엔딩이 스토리를 깔끔하게 매듭짓는 것도 아니다. 결국 강렬한 연출로 이목을 집중시키는 데는 성공한 반면에 스토리의 집중력을 끌어올리는 데에는 실패한 셈이다. 애초에 스토리를 애매모호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였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최소한 스토리상의 전후 맥락을 확실하게 연결해주는 매개체나 연결 고리 정도는 확보해두는 편이 맞지 않았나 싶다.

아마 여기가 엔딩인줄 아는 이들도 적지 않을 듯.
SIGNALIS 사실상 유일하게 대사를 지닌 캐릭터.
SIGNALIS 의도는 대강 알겠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사의 집중력은 다소 부족해 보인다.
■ 명확한 강점이 매력이다!

시그널리스는 장점과 단점이 굉장히 뚜렷하게 나뉘는 게임이다. 호러와 미스테리가 적당히 가미된 SF 세계관, 명확하게 레트로 감성을 지향한 그래픽과 게임성, 플레이어의 몰입을 더하는 화려하고 강렬한 연출은 이 게임이 자신있게 내세울 수 있는 장점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편의성과 쾌적함이 조금 떨어지는 게임 플레이와 더불어 집중력이 부족해 이해하기 어려운 스토리 전개는 뼈아프게 다가올 만한 단점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이 게임이 스팀에서 '압도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것에 대해 선뜻 이해하지 못하는 입장이긴 하지만, 명확한 강점을 내세워 많은 이들이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게임임에는 분명해보인다. 그만큼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만한 게임이며, 공상과학과 호러를 표방하는 게임의 비주얼과 분위기가 취향에 맞고 이런저런 제약으로 인한 게임 플레이의 불편함만 감내할 수 있다면 충분히 추천할 만하다.

SIGNALIS
Kutar'k 필자: Kut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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